- 1. 부상 회복과 기대, 그리고 경기장으로
- 2. 주차지옥, 예열도 못한 채 출발선으로
- 3. 3km 만에 깨달았다, 오늘은 ‘그날’이다
- 4. 땀이 아니라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기분
- 5. 죽음의 업힐, 그리고 거짓말 같은 100m
- 6. 기록보다 소중한 것, 살아서 돌아온 나
지난겨울, 나는 꾸준히 마일리지를 쌓았다. 수없이 반복된 인터벌과 LSD, 그리고 회복조깅.
무릎 통증으로 고생했던 몇 달이 지나고, 드디어 몸이 제 컨디션을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서울신문 하프마라톤’에 등록했다.
2025년 5월 17일 토요일 아침.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기록 경신은 물론,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믿으며.
상암 월드컵경기장 근처에 도착했을 땐 출발까지는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주차장이었다. 주차 공간은 이미 만석. 수많은 차량들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1시간 가까이 주변을 맴돈 끝에 겨우 자리를 찾았고, 시계를 보니 출발까지는 15분.
몸을 풀 시간도 없었다. 그저 허겁지겁 유니폼을 챙기고, 배번을 붙이고, 바로 출발선으로 뛰었다.
출발 신호와 함께 나는 기분 좋게 페이스를 유지하며 뛰기 시작했다. 초반엔 다리가 가볍게 느껴졌고, 기온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3km 지점, 갑자기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기상청은 '흐리고 가끔 비'라고 했는데, 이건 무슨 고급 태양광 램프인가?
3km 만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든 강렬한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직감했다. 오늘은 기록이 아닌, 생존을 위한 레이스라는 것을.
더운 날에도 달려본 경험은 많았지만, 오늘처럼 ‘숨이 마르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에너지가 소진된다기보다, 마치 내 몸속 수분과 정신력까지 말라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입은 바짝 말라붙고, 자꾸만 '포기할까?'라는 유혹이 스쳤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 대회를 위해 3개월을 준비해 왔고, 집에 있는 아이들도 생각나면서 다시 발을 내디뎠다.
1km가 10km처럼 느껴지는 신기한 마법.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앞으로. 그리고 또 앞으로.
드디어 마지막 1km.
아무리 힘들어도, 이제 거의 다 왔다 생각했는데… 내 앞에 펼쳐진 건 '업힐'이었다.
그것도 그냥 언덕이 아닌, 진짜 정신이 아득해지는 오르막.
순간 다리가 멈췄다. 처음으로 걸었다. 정확히 1분, 경보 선수처럼 빠르게 걷다가 다시 정신을 부여잡고 마지막 스퍼트를 시작했다.
"100m 남았습니다!"라는 자원봉사자의 말에 힘을 냈는데… 어라? 피니시 라인은 300m 더 가야 보였다. 진짜 울컥했지만, 이를 악물고 마지막 전력질주! 그리고 드디어… 피니시. 나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기록은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새로운 PR은 아니었고, 오히려 평균보다 느린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그 지독한 더위 속에서도 내 두 발로 결승선을 밟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음료를 들이켜고, 물을 끼얹고, 메달을 받아 들고, 차로 돌아가 에어컨을 틀며 다짐했다.
“기록은 다음에. 오늘은 살아남은 것만으로 충분해.”
그리고 한 가지 더. 6월~9월 대회는 신청하지 말자. 제발.
하프 마라톤이 아니라 생존 레이스였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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